시조(始祖) 남궁원청(南宮元淸)이 고려 성종(成宗)때 함열백(咸悅伯)에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일단 익산(益山)은 우리 나라 남궁씨의 근원지(根源地)이다. 18世 참봉공( 奉公) 남궁후(厚)의 후손들은 양주(楊州) 일원에 터를 잡았는데 19世 저(著)는 임진왜란 때 공주군(公州郡) 장기면(長岐面)으로 옮겨가 세거하였고 그의 아우 지(芷)의 대(代) 이후로는 가평(加平), 강화(江華), 연천(漣川), 연기(燕岐), 아산(牙山) 등지에 터를 잡은 것 같다. 교리공(校理公: 18世) 남궁희(憘)는 지금의 서울시 도봉동(道峰洞)에서 세거하며 20世 니( )의 후손들은 과천(果川)과 제천(提川) 등지로 옮겨갔으며, 역시 20世 구(構)의 후손들은 파주(坡州)로, 격(格), 부( ), 미(楣)의 대 이후로는 홍천(洪川), 가평(加平), 함열(咸悅)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18世 남궁침( )의 아들 중 길( )은 양주(楊州)에서 터를 잡고 가평(加平) 음성(陰城)으로 세거지를 확대했으며 견( )은 고창(高敞)으로 옮겨가 영광(靈光), 부안(扶安), 제천(堤川), 괴산(槐山) 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셋째 아들 식(湜)의 자손은 가평(加平), 광주(廣州), 화천군(華川郡) 일원에 터를 잡았고, 다섯째 아들 영(泳)의 후손들은 강화(江華), 김포(金浦)에 세거하면서 예산(禮山), 부여(扶餘), 평택(平澤)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18世 남궁기( )의 자손 중 19世 도(渡)의 대 이후로는 양주(楊州) 홍천(洪川) 등지에, 준(濬)의 대 이후로는 중원(中原), 광주(廣州) 등지에, 섭(涉)의 대부터는 함열(咸悅), 홍천(洪川), 횡성(橫城) 등지에 터를 잡았다.
18世 남궁제(悌)의 아들 중 행(荇)은 함열(咸悅)에서 세거하며 일부가 23世의 대를 전후하여 만경(萬頃), 정읍(井邑), 태인(泰仁), 부안(扶安), 금천(金川)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둘째 아들 명(蓂)의 대부터는 양주(楊州)에 터를 잡았고, 무장(茂長), 고창(高敞), 영광(靈光) 일원으로도 옮겨가 살았다. 헌( )의 대부터는 평산(平山), 금천(金川)에 터를 잡고 뒤에 일부가 이천(利川)으로도 옮겨가 살았다. 넷째 아들 협(莢) 이후로는 부여군 임천면(夫餘郡 林川面) 일원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8世 회(恢)의 후손은 홍천군 동면(洪川郡 東面) 일원과 서울시 도봉동(道峰洞) 일원에서 세거했으며 역시 18世 남궁숭(崇)의 후손은 양주(楊州), 포천(抱川), 파주군(坡州郡) 일원에 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加平郡 外西面), 강화군 강화읍 양도면(江華郡 江華邑 良道面), 포천군 군내면(抱川郡 郡內面), 김포군 하성면(金浦郡 霞城面) 일원.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일원.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平山郡 細谷面) 일원.
충남 부여군 장암면(夫餘郡 場岩面), 공주군 장기면(公州郡 長岐面) 일원.
전북 익산군 성당면(益山郡 聖堂面), 고창군 상하면(高敞郡 上下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76년 병진보(丙辰譜)에 의하면 경기도 가평(加平), 청평(淸平), 강화(江華), 과천(果川), 파주(坡州), 양주(楊州), 광주(廣州). 강원도 홍천(洪川), 횡성(橫城). 황해도 평산(平山). 충남 부여(夫餘), 공주(公州), 연기(燕岐), 아산(牙山). 충북 중원(中原), 음성(陰城). 전라도 익산(益山), 고창(高敞), 부안(扶安), 정읍(井邑), 무장(茂長), 영광(靈光). 서울시 도봉동(道峰洞)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